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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사랑에 눈이 먼 집착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자유

가우초 2008. 9. 22. 18:27


영화 카르멘(2003)은 개인적으로 스페인 영화를 참 좋아하게 만들어준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고 매우 색다른 느낌으로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다.

영화속에서 우리는 누구의 시점으로 이 영화를 관람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겠다. 선천적으로 신용과는 거리가 먼 직업과 태생을 가지고 있는 카르멘의 입장에서 영화를 볼 것인가 아니면 신뢰할 수 있는 직업의 소유자였던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영화를 볼 것인가이다.

물론 감독의 경우 쉽게 가기 위해서 남자 주인공의 입장을 전적으로 인용을 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우리가 단순히 그럼 그렇게 봐야지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카르멘의 입장에서 영화를 볼 필요성도 생기는 것이다.

영화를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면 단순히 카르멘이라는 여성을 나쁜 여성으로 몰고갈 수 있다. 남자 주인공의 입장은 그렇게 전달이 된 것이나 우선 카르멘의 입장으로 들고가보자.


태생부터 집시 출신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 집시가 그렇듯 어느 한곳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된 직업을 계속해서 가지고 살지도 않는다. 그렇듯 여기서의 카르멘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게 된다. 담배말이를 시작으로 창녀, 산적, 점술가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나가게 된다. 그렇다고 중간에 가지게 된 직업이 고귀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천하게 태어나서 천하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간 한 여성일 뿐이다.

이렇게 하찮은 직업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 집시라는 사실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카르멘의 입장으로 바꿔서 생각을 했으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좋은 직업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만큼 자신의 자유를 팔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찮다고 느껴지는 직업이라도 그만큼 내가 하고싶은대로 할 수 있다면 그에대한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예를들어 집이라는 자신의 자산이 있다면 그곳에서 머무르게되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면 자산을 팔고 거기에 자신의 집을 사고 그런 복잡한 문제에 얽히게 되지만 천한 직장과 자산도 없다면 자기가 떠나고 싶은 곳으로 그냥 무작정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남자 주인공은 카르멘을 사랑한다. 정말 너무 사랑한다. 우리가 이 남자 주인공의 행동을 보고 사랑이라고 규정짓기는 조금 왜곡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개인에게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일단 사랑이라고 하자. 여기서 남자 주인공의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왜곡된 사랑의 결정체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을 해보면 당신이 사랑한 것이 사람이 아닌 물체라고 가정을 하더라도 정말 놓아주기 싫고 언제나 함께하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낀적은 없는가?

물론 남자 주인공의 행동으로 우리는 사랑을 하더라도 저렇게 집착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을 하고 단순히 교훈적인 의미로 넘어갈 수 있다. 남이하면 불륜 내가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은 아니다. 사랑에 대한 소유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갓 태어난 아기도 부모의 관심을 위해서 울고 난리를 피운다. (물론 이 부분은 생존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자신은 그런적이 결코 없는가에 대해서 투영해볼 수 있는 캐릭터로 존재한다.


반면 카르멘의 경우 어떠한가 자신은 별로 관심도 없는 남자가 자기 좋다고 쫓아다니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짝사랑 영화를 정말 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는 점은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해보면서 느끼는 바가 생기기 때문이다. 자신을 짝사랑 하면서 집착을 하던 사람을 한번 떠올리면서 카르멘의 입장에서 자신을 투영해보자. 남자 주인공의 경우는 어떻게 하더라도 자신에게 투영을 할 수 있겠지만 카르멘의 경우 경험상 자신에게 투영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이 집착을 가졌지만 그 집착을 느끼는 상대방으로 생각을 해보자.


캐릭터에게 자신의 경험을 투영을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보다 영화속의 내용은 상당히 왜곡된 사랑으로 진행되고 있다. 카르멘을 차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고 영화 끝에서는 결국 카르멘을 죽이는 일까지 생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에게 투영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짝사랑을 하는데 상대방은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의 경우 모를 수 있겠지만 그냥 그렇다고 가정을 해보자. 이때 갈림길에 서게 된다. 다른 사람과 한판 뜨던지 체념을 하는 길로 걸어가게 된다. 물론 둘 다 이 세상에서 얼마든 가능한 일이다.

조금 간단한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보자 우리 모두 아이가 된다고 가정을 하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인형이 있고 A라는 아이도 그 인형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나도 그 인형을 가지고 싶고 A도 그 인형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인형은 단 한사람의 소유가 아니고 유치원에 속해있다. 가끔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도 그 인형을 가지고 논다. 하지만 나는 그 인형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혼자 가지고 놀고싶다.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은 자기가 옆에 붙어만 있으면 얼씬대지는 않지만 A라는 아이는 처치곤란이다. 그래서 나는 A라는 아이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결국 영화 마지막에 카르멘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다. 집착이라는 이유로 카르멘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결국 죽이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의 경우 남자 주인공의 입장과 카르멘의 입장으로 볼 수 있는데 먼저 남자 주인공의 입장부터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남자 주인공의 경우 그토록 카르멘을 사랑하여 쫓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카르멘을 소유할 수 없었다. 하물며 산적두목까지 죽였는데도 카르멘은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최후의 선택으로 죽여서라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치솟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조금 종교적인 부분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성찬식의 경우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살과 피를 먹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동남아시아의 경우 동물을 산채로 먹는 최면 의식을 통해서 그 동물과 하나가 되는 행동을 보여주기도 하고 고대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를 받아들이는 의식에서도 그런 행동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종교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영화 향수의 마지막 장면이 가장 좋게 표현을 했다고 생각을 한다. 여기서는 카르멘을 죽이는 것을 조금 고등 종교적으로 표현을 했다고 보면 되는데 먹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 의미가 존재하고 교회에서 살인을 했다는 것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사후세계를 비는 면모와 제단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그 해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카르멘의 입장에서 죽음을 다시 보도록 해보겠다. 카르멘은 그동안 구속을 피해서 자신의 자유를 찾아 그렇게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주인공은 끝까지 쫓아왔고 죽여달라고 말을 하면서 결국 자신의 자유를 찾아서 떠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너를 사랑할바에는 죽는 것이 좋겠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영화 앞부분부터 카르멘의 자유를 관점으로 본 사람의 경우 이 장면이 상당히 인상깊게 다가갈 수 있겠다.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자유를 갈망했던 카르멘과 사랑의 소유욕으로 불타올라 결국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고간 남자 주인공은 결국 영화속 최후의 피해자로 남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악녀 카르멘으로 다가오는가 자유를 갈망한 카르멘으로 다가오는가는 마치 2가지 상이 떠오르는 한폭의 그림처럼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을 것 같다.